한국에서도 귀국을 권하는 사람이 있었고, 소피아대학원에서도 내가 돌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돌아가려하지 않자 내가 듣는 수업의 수를 줄이라고 권했다.
그러나 한편에는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소피아대학원에는 한국인 신부님이 한 분 있었는데 그 분은 내가 아프기 전부터 내게 하루 한시간씩 따로 개인지도를 해 주었고 한 이태리인은 수업시간이면 내가 그 때 그 때 자기에게 물을 수 있도록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강의를 메모해 수업이 끝나면 바로 나에게 주었다. 나는 그 메모를 단어를 찾아가며 읽었다. 교재가 없는 수업에는 교수에게 강의를 위해 준비한 자신의 메모를 미리 메일로 받고 싶다고 청했다. 그리고 모든 강의를 녹음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아 수업이 끝난 후 몇번이고 다시 들었다.
이년이 지났을 때, 이태리어가 부족해 논문을 쓰지는 못했지만 한국에 돌아가 이 자료들로 공부를 이어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지진아였고 민폐인생이었으나 나는 소피아의 그 다이나믹하고 아름답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던 문화에 깊은 감동을 간직하고 돌아왔다.
복직을 하자 중원구 상대원1동으로 발령이 났다. 아이러니컬하지 않은가? 나는 퇴직한 사회복지직의 자리를 메우게 되었다. 사실 내가 해외유학휴직을 했을 때는 그 3년 전부터 그 제도가 시행되지 않을 때였다. 인사 라인에서는 내게 그 휴직을 허락하지 않으려고 했고, 나는 엄청난 비난을 무릅쓰면서 휴직발령을 받아냈다. 내게 휴직허락을 한 후 성남시는 다시는 나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시장결재로 그 길을 막아 버렸다. 이 퇴직한 직원은 내 사례를 보고 자기도 영국유학을 하기 위해 수속을 하면서 해외유학휴직을 시도하다가 결국 사표를 내고 유학을 갔다고 한다.
사무장은 내 동기였다. 성남시는 동에서 구청, 구청에서 시청으로 갔다가 진급을 하면 동으로 다시 온다. 나는 구청에서 다시 동으로 뒷걸음질을 친 것이고, 진급은 바랄 수 없게 되었다. 얼마 후 내게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던 동기가 다른 곳으로 가고 새로운 사무장이 왔다.
그동안에는 이 인사이동의 사이클에서 나도 비슷하게 움직였으므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한둘은 있었으나 지금 동에 있는 직원들은 나보다 훨씬 어린 사람들이었다. 그 사이 사회가 변하여 이 젊은 공무원들은 집안도 좋고 교육수준도 높으며 자기중심적이고 효율을 추구하는… 내게는 낯선 새로운 인종이었다.
발병은 내 일 때문도 아니었다. 주민센터에서 자리는 매우 중요하다. 출입구 쪽에 앉는다는 것은 자기 담당 업무에 끊임없이 방해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민센터에 가보면 지금은 아예 입구에 안내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 때는 입구에 앉은 사람은 민원인들이 등본 어디서 떼어요? 같은 말에 하루종일 대꾸를 해야 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사회복지직 공무원이 사무장에게 자리를 바꾸겠다고 하였다. 사회복지직원에게는 장애인 도우미가 있다. 소아마비 환자인 이 도우미는 안쪽에서 자료정리를 하다가 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로 나가게 되고, 정규직인 그 공무원은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그 도우미에게 사전에 의논이 있었는지 동의를 했는지 물었다. 그의 의사는 미리 묻지도 않았고, 직원이 사무장의 허락을 받고 자리를 옮기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사무장과 그 직원이 의논을 주고받는 모습을 미리 보았는데 그 때 사무장과 눈이 마주쳤더랬다.
그 날부터 나는 사무실에 있는 동료직원들이 무서워서 함께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약한 사람이 더 약한 사람을 어떻게 이용해 먹는지를 목격한 그 식인의 현장은 오랫동안 견뎌왔던 내 상처를 덧내었던 것 같다. 나는 자신만만하고 똑똑한 젊은 공무원들이 두려웠다. 사무장을 시작으로 다른 공무원들의 눈을 보면 호랑이가 달려드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그 무섬증은 집에서도 발동을 했다. 나는 엄마가 무서워서 집에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모르는 사람은 괜찮았지만 아는 사람과 가족이 무서웠다. 내게는 가족들 또한 가해자였던 것이다. 결국 병원에서 “신경쇠약”이라는 진단을 받고 병가를 내어 한동안 남쪽의 수도원을 떠돌며 지냈다.
복직원을 내자 이번에는 인사팀에서 내게 어디서 근무하고 싶은지 물었다. 나는 사람과 접촉이 적은 곳을 원했다. 업무량이 상대적으로 적고 민원을 대하지 않는 민방위팀으로 발령이 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업무 또한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끊임없이 전쟁을 대비해야 하는 그 일이 나는 괴로웠다.
당시는 이재명이 처음으로 시장이 되었던 시기다. 그가 행한 여러가지 혁신 중에 내부망을 통해 공무원들이 직접 시장에게 메일을 보낼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다. 그리고 그 메일은 시장만 열어 본다는 것이다. 다음 인사시즌에 나는 시장에게 메일을 썼다. 그리고 시청의 기업지원과로 발령을 받았고, 기업지원과장이었던 최영일 과장을 다시 만났다.
나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2013년도에 서울산업대에 복학해 석사를 마쳤으니 그 때부터 정년까지 돈을 모으면 박사과정을 시작할 수 있겠다 싶은 희망도 있었다.
내 업무 중에는 판교 테크노벨리 관리도 있었다. 테크노벨리 조성 시기에는 업무량이 많았겠지만 내가 있는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 나는 업무 분장에 그 일이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2014년 가을, 지역의 한 신문사에서 조성이 끝난 판교에 지역축제를 개최하겠다면서 시장에게 축사를 부탁해 왔다. 나는 축사 원고를 쓰고 축제 당일 시장이 갈 때 그 곳에 함께 갔다 오게 되었다.
10월 17일 아침, 나는 현장에 가서 무대와 주위를 둘러보고 동선을 미리 체크했다. 무대에서 떨어진 뒤쪽에는 좌판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저녁에 무대 뒤쪽에 차를 세우고 시장은 오른쪽의 귀빈석으로 갔고, 나는 왼쪽으로 돌아 뒤편의 좌판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걸음 걷지 않아 무대의 음악이 끊겼다. 으이구~ 시원찮기는… 도대체 음향장치를 어떻게 설치한거야. 하고 뒤를 돌아보니 사람들이 어딘가를 보고 있다. 시장도 달려왔다. 나도 그 곁으로 갔다. 무대를 좀더 잘 보려고 사람들이 올라갔던 환풍구가 무너졌던 것이다.
잠시 후, 전화가 왔다. 지하 4층으로 오라는 것이다. 내가 도착했을 때, 바닥에는 사람들이 즐비하게 눕혀져 있었다. 나는 부상자들이 구급차를 기다리는 줄 알았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그들은 사망자였다. 다시 지상으로 왔을 때 몰려온 구급차와 언론사의 차들로 주위는 대낮같이 밝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분당구청 강당에 차려진 대책반으로 갔고 거기서 꼬박 사흘동안 집에도 가지 못하고 제대로 자지도 못하면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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