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공부의 시작은 고등학교에 자퇴서를 내고 집에 돌아오던 바로 그 날이다.
단칸방에서 교복을 벗어 옷장에 걸 때 아버지는 벽을 향해 돌아누워 있었다. 힐끗 보니 아버지 눈에 눈물이… 모르는 척 방문을 열고 나가려고 할 때 뒤에서 아버지가 나를 불러 세웠다.
여기 와 앉아 보라던 아버지는 나를 잘 키우고 싶었는데 힘이 없어 여기까지 밖에 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한글을 가르쳤으니 이제부터 공부는 네가 알아서 하라고 하였다. 지금 세상에 고등학교도 나오지 못하고 살아가려면 할 수 있는 일이 남의 집 살이나 공장에 다니는 것 뿐일테지만 손에서 책을 놓지 말라는 것이다. 비록 학벌이 없어도 내가 공부를 놓지 않으면 평생 식모살이 밖에 하지 못한다 해도 다른 사람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겠지만 아무리 부자가 된다해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속이 허할 것이라고 하였다. 살다가 결혼할 나이가 되면… 결혼과 공부를 다 할 수 있으면 둘다 하되 둘 중 하나 밖에 할 수 없다면 공부를 하라고…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는 결혼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아내도 자식도 다 있지만 그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어딘가가 있다는 것이다.
살다가 집안이 어려워지면 선택지가 둘이 있다. 하나는 한 입이라도 덜기 위해 아이들을 친척집에 나눠 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흩어지지 않고 서로 도우며 그 시기를 넘기는 것인데 이제 부모가 힘이 부족하여 사정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맏이인 내 힘을 보태달라고 하였다. 내가 몇 년만 동생들을 위해 부모님을 도우면 동생들이 자라 나를 도울 수 있을 것이고, 긴 인생을 생각할 때 공부가 몇년 늦어지는 것은 큰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공부는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고, 무엇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길에서 교복을 입은 또래를 보면 나는 울었다. 다시는 다른 사람과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갈 수 없다. 사지가 멀쩡하였으나 나는 사회적 불구가 되었다고 느꼈다.
몇 년이 지난 후, 동생들이 자라면서 아버지가 약속했던 그런 날, 동생들이 자라서 내가 다시 학교 공부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날은 결코 없으리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 전에는 싸운 기억이 없다. 그러나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명희와 나는 많이 싸웠다. 중국집을 할 때… 그 날도 대판 싸운 끝에 명희가 내게 말했다. “야, 너는 엄마 아버지가 오냐오냐 해주니까 니가 착한줄 알지? 웃기지 마. 지금 니가 할 수 있는 게 설겆이하고 배달하는 거 밖에 더 있어? 다른 걸 할 줄 아는데도 그러구 사냐? 나는 고등학교 졸업하면 절대 식당일 하지 않을거야. 취직해서 돈 벌어도 절대 집에 내놓지 않을거야”라고 했다. 나는 내 삶을 깡그리 헛수고로 돌리는 그 말이 분하고 분했다.
그러나 명희도 제 뜻대로 살지 못했다. 명희가 취직을 하고 직장을 갖게 되었을 때 명희 또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죽도록 일했으나 그 돈을 자기가 갖거나 쓰지 못했다. 그나마 식당도 문을 닫고 우리집에서 명희가 유일하게 정기적인 수입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명희는 한번도 적금을 만기가 되어 타보지 못하고 동생들 밑으로 다 밀어 넣었다. 물론 그 놈들은 그런 일을 기억도 하지 못할 것이다.
장남인 호중이는 중학생 때부터 어떤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아버지가 반대하자 집을 나갔다. 여러 해를 교회에 살면서 그 상태로 인천교대에 갔다. 호중이가 중학교를 다닐 때 화전민 촌에서 나와 용인의 중학교로 전학을 했다 그 수속을 하러 내가 학교에 갔다. 선생들이 서로 호중이를 받지 않으려고 입씨름을 했다. 한 선생이 호중이의 성적을 보더니 자기 반에 받았다. 호중이는 국민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헐레벌떡 집으로 뛰어와 “엄마, 내가 반장이 됐어”라고 했던 아이다. 공부 잘했고, 온순하고 착했다. 용인의 그 선생은 가정방문을 와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어렵게 살면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을 대단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무리 어렵더라도 절대 학교를 중단시키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 아이는 학교만 보내 주면 서울대에 혼자 갈 아이라고 했었다.
막내가 서울대를 졸업한 뒤 삼성전자에 특채가 되면서 한 말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자기 동기들은 대학원에 진학을 하거나 외국으로 유학을 가는데, 대학 졸업하면서 바로 취직하는 사람은 루저라는 것이다-누구나 자기가 선 자리에서 더 앞으로 나가고 싶고 옆을 돌아볼 여력은 없다-그리고 큰누나가 집안을 위해 희생적으로 일했다고 하지만 사실 큰 도움이 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막내는 월급을 받아 꼬박꼬박 아버지에게 드렸다. 아버지는 이제야 앞길이 보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육개월 후 사표를 내고 막내는 포콜라리노가 되기 위해 한국을 떠났다.
아버지가 내게 그려보여 주었던 그런 날들은 없었다. 광신자의 아들은 무신론자가 되고, 무신론자의 아들은 광신자가 된다더니… 그토록 사회를 원망하고 종교에 적대적이던 아버지는 그렇게 두 아들을 잃었다.
아버지는 집나간 큰아들만 해도 원통한데 막내까지 한국을 떠나자 거의 실성한 듯 분을 참지 못하였고, 특히 막내 일로 나를 원망했다. 막내를 포콜라레에 데려간 것이 나였기 때문이다. 당시 공무원이었던 나는 엄마의 슬픔과 아버지의 원망을 견뎌야 했다. 명희는 결혼을 했고 부모님의 생계는 내 책임이 되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해는 2003년이다. 수술을 한 것은 2001년 겨울인가 보다. 퇴원해 집에 돌아 온 내게 미국의 막내가 전화를 했다. 포콜라레를 나오겠다는 것이다. 더 일찍 말하고 싶었지만 내 건강이 좋지 않아 수술이 끝나기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2002년은 내게 참으로 괴로운 한 해였다. 낮에는 일을 하며 잊지만 밤에는 온갖 상념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나는 늘 아팠으므로 그 때도 오래 살지는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살아야 했다. 내가 죽으면 엄마 아버지는 길에 나앉게 될 것이다. 그 때 나의 유일한 목표는 엄마 아버지 보다 먼저 죽지 않는 것이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책을 읽는 것과 생각하는 것 외의 다른 취미가 아무 것도 없다. 혹시라도 힘과 시간을 뺏길까봐 나는 모든 것에 눈을 감았다. 술 담배도 못한다. 노름도 모른다. 남자도 모른다. 친구도 없다. 내가 괴로운 생각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부였다.
지방자치단체장 선출방식이 민선으로 바뀌면서 자기가 성남시장이 되면 시청 안에 대학을 열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던 김병량이 시장이 되면서 시청 안의 한 방에 근무시간 이후에 교수가 진행하는 강의가 열렸다. 비록 과는 경영학과 하나 뿐이었지만… 내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공부는 내게 진통제였다. 그 때 내 나이 마흔 여섯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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