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에 이어지는 생각.
20대 초반, 나는 계속 살아야 할 지, 내 손으로 삶을 끝내야 할 지 오래 고민했다. 과연 가슴을 에이는 모멸과 끝없는 과로를 감수하고 일생 무릎걸음으로 진창 속을 걸어가는 것을 견뎌낼 만한 가치가 삶에 있는 것일까?
현실에는 출구가 없고, 곁엔 내 물음에 답해줄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런 내게 말을 걸어 오던 유일한 존재는 책 속의 사람들이었다.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이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곤 했다.
법정 스님은 사람만이 아니라 책도 시절인연이 닿아야 만난다고 했는데 정말 그런지도 모른다.
그 때 나는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의 글을 되풀이해 읽었다. 내 생각에 아우슈비츠는 2차 대전 중의 폴란드만이 아니라 지금도 세상 곳곳에 있는 거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난 이가 빅터 프랭클이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데 그는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을 책으로 내었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로고테라피를 고안한 정신의학자이다.
빅터 프랭클은 언젠가 가스실에서 죽은 사람들이 벗어 놓은 옷을 정리하는 일을 했다. 그 중 유대인 랍비가 벗어놓은 옷의 속주머니에서 야훼를 찬양하는 기도문이 나온다. 이어지는 그의 성찰은 울림이 깊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같은 인간을 가스실로 몰아넣고, 같은 유대인이면서 독일군인보다 더 혹독하게 동족을 괴롭히는 간수가 될 수 있는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스실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하느님을 찬양할 수도 있는 존재이다. 그가 누구인가는 그가 선 자리가 아니라 자기 앞의 생을 마주하는 그의 태도가 결정한다. 머 이런 의미였던 거 같다.
그 오래 전 읽었던 책의 내용( 그대로인지는 모르겠으나)이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그 말을 부여잡고 나는 그 위태로운 순간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나는 내 존재의 의미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입으로 저울질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내 안의 음성에 귀기울이면서 누구에게도 나를 헐값에 넘겨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이 포콜라레를 만나기 직전 내 마음의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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