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시청은 수정구 태평동에 있었다. 내가 입학한 것은 청내대학이 시작되고 3년쯤 되었을 때였다. 처음에 관내 경원전문대의 2년 과정으로 시작된 이 학교는 선배들이 서울산업대와 연결하여 4년제가 되어 있었다.
그 시절을 생각하니 지금도 행복하네. 늘 혼자 책을 읽던 내게 같이 이야기할 상대가 생겼다. 내게도 그 책의 가치와 한계를 이야기해 주고 맥락을 짚어주며 질문을 할 수 있는 “너”, 선생님이 생긴 것이다. 학기가 시작될 때 강의 계획서에 있는 참고서적의 절반 정도는 이미 내가 읽은 책이었다. 그 책들의 의미가 다시 환해지고 시야가 넓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여름에는 차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허브차를 준비해 보온병에 담아 갔다. 내게는 교수님 한분 한분이 소중하고 고마웠다.
근무할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도 형성되었다. 나중에 퇴직할 때 나의 과장님이었던 최영일 팀장과의 인연이 생각난다. 그 분은 사회부적응자인 나에 대해 부정적 선입견이 있었다. 1년쯤 한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난 후에야 내게 말을 걸었다. “근데 강영선씨는 그 때 왜 그랬어?” 하하~ 내가 “미친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최영일 팀장은 나중에 공릉동에 있는 대학원 진학도 함께 했다. 그 분이 태평4동장으로 있을 때 나는 1년 정도 그 분 차로 대학원 수업을 들으러 다녔다. 늘 피곤했던 나는 차만 타면 잠이 들었다. 내가 미안해 하면 소탈한 대인배의 풍모를 보여주곤 했다.
4학년이 되었을 때, 만일 저 분이 지도교수가 된다면… 하고 속으로 점찍은 교수님이 있었다. 그때는 내가 교수님을 선택할 수 없었고 한 해에 한 분이 전체 우리 반의 논문지도를 하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내가 생각했던 김삼수 교수님이 그 해의 논문지도교수가 되었다.
나는 내 박사논문의 주제이기도 한 EoC로 쓰고 싶었지만 그걸 어떻게 말할지 몰랐다. 어느 포콜라레의 큰 모임에서 쉬는 시간에 옆 사람에게 고민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왠 사람이 지나다가 박영봉신부님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분이 같은 주제로 박사논문을 쓰고 있다고 한다. 그 분의 이메일 주소를 알아내어 편지를 썼더니 정중한 답장이 왔다. 쉽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을 몇 번을 곱씹어 보니 한마디로 “니가 뭘 하겠니”로 읽혔다. 나는 내 소개와 함께 왜 내가 이 주제로 글을 쓰고 싶은지를 설명하는 좀 긴 편지를 다시 썼다. 그 메일에 아주 짧은 답이 왔다. 잘 되기를 바란다고… 그리고 첨부된 파일을 열고 나는 놀랐다. 그 분이 쓰는 중인 자신의 글 전체를 보내준 것이다!!
그 중 20장 정도를 출력해서 지도교수에게 가져가 “나는 아직 어떻게 말할 지 모르지만 이 주제가 교수님 말씀처럼 너무 이상적이어서 비현실적인 것만은 아닐지 모른다. 이런 공부를 하는 분이 한국에도 있다”고 하며 보여 드렸다. 다음 수업시간이 끝난 후, “나는 내가 모르는 주제의 논문을 지도할 수 없으니 니가 나를 납득시켜 보라”면서 허락해 주었다.
나는 김삼수 교수님이 계신 산업대학원 진학을 결정했고, 박영봉 신부님의 조언을 받아들여 한 해를 마친 후 휴학을 하고 교대 근처의 이태리어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신부님은 이태리어를 모르면서 논문을 쓰는 것이 너무 어렵다면서 정말 공부를 하고 싶으면 먼저 이태리어로 된 서적을 논문에 인용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한국 포콜라레에서는 2004년 부터 정치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정치와 행정이 같은 가닥이라고 내게도 함께 하자는 요청이 있었다. 다른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포콜라레에서 하자는 것은 거의 받아들였기 때문에 직장과 공부를 겸하고 있는 와중에 그 일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6개월의 이태리어 과정을 마칠 무렵 어느 날, 모임 시작 전 국회 본관 로비 바닥에 노트북이랑 휴대용 프린터를 펼쳐 놓고 자료 수정을 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 당시 한국포콜라레 남자 책임자였던 갈로이가 바로 옆 소파에 앉아 있다가 “이태리어를 배우려면 이태리에 가야지” 라고 말을 걸었다. 나는 “아이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바쁜데 무슨…” 하고 한마디로 받아쳤다. 갈로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런 모임을 한번 하고 나면 나는 며칠을 못일어날 만큼 아팠다. 보름쯤 지난 어느날 밤 문득 그 장면이 기억났다. 호의로 말을 했을 갈로이에게 너무 심했구나…ㅠㅠ 당시 여자쪽 책임자였던 엘레나에게 전화로 그런 말을 했더니 엘레나는 하하 웃으면서 미안하다면 니가 직접 사과하라고 하였다. 마침 며칠 후 속리산에서 마리아뽈리가 열리는데 엘레나와 갈로이는 하루 전에 내려 간단다. 엘레나는 너도 하루 일찍 와서 갈로이를 만나라고 하였다. 그렇게 속리산에서 그 두 분과 함께 이야기를 하면서 유학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살다 보면 수렁에 빠진 것처럼 꼼짝달싹 할 수 없는 때가 있는가 하면 등 뒤에서 어떤 힘이 나를 밀어주고 모든 상황이 길을 열어주는 것 같은 때도 있다. 그 끝이 살 자리인지 죽을 자리인지 모르지만…^^
예전에는 중앙부처의 공무원에게만 가능했던 해외유학휴직이라는 제도가 지방공무원에게도 열린 것은 노무현 정부 때였다. 해외유학휴직을 하면 본봉의 50%가 나온다. 나는 그 제도의 덕을 입을 수 있었다. 그 과정은… ㅠㅠ 엄마를 명희에게 맡기고 보험과 적금을 해약하고 차를 판 돈을 들고 뻬루쟈로 떠났다.
뻬루쟈에서 언어과정을 하던 2008년 3월 포콜라레 운동의 창시자인 끼아라 루빅이 세상을 떠났다. 로마의 바오로 성당에서 장례미사에 함께 하며 내 마음은 얼마나 뜨겁게 끓어 올랐던가! 그 해 가을 로삐아노에서 소피아대학원이 개교를 했고 나는 입학에 필요한 최소한 점수를 들고 그 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공부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나의 결정이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다. 내 능력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너무 먼 곳까지 와버렸다.
그 해 11월 어느 날, 오전에 한 번, 점심 때 식당에서 나오다 한 번 심장에 통증을 느꼈다. 저녁에 로비에 앉아 있는데 한 신부님이 지나가다가 방에 올라가 쉬라고… 미사를 꼭 매일 해야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내가 하긴 걸어서 성당까지 갈 수는 없겠다. 누가 차를 태워주면 가겠는데…하고 답을 했더니 지나가던 어떤 아이가 저 차가 테오토코스로 가니 기다리라고 하였다.
미사가 끝난 후 나는 일어날 수 없었다. 지나가던 다른 신부님에게 아까 그 신부님을 불러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분은 나를 보더니 바로 의사를 찾아 왔고 그 의사가 내 혈압을 재더니 빨리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하였다. 수면부족으로 혈압이 230까지 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응급실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심장이 멎었다.
정말 사람에게 명이 있는걸까? 그 때 나는 몇번의 죽을 자리를 묘하게 피했다. 로비에서 방으로 올라갔더라면 다음날 시체로 발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의사도 신기하게 생각했다는데… 그날 퇴근길에 진료실에서 깜빡하고 혈압계를 들고 나와서 성당 앞 차에 두고 있었기에 바로 내 혈압을 잴 수 있었단다. 병원에서의 응급조치 후 나는 소생했고, 예후를 보기 위해 사흘을 더 병원에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퇴원하기로 한 날 아침, 어디서 콸콸 물 흐르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아이고 이런 시골병원… 입원실에 하수도관이 지나나 하고 일어나 앉으니 코에서 피가 쏟아졌다. 하수도가 아니라 피가 목으로 넘어가는 소리였던 것이다. 그 피는 멎지 않았다. 급하게 피렌체의 병원으로 가 처치를 하는데… 코에 무언가를 박는 통증에 나는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그것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는지 사흘 후에 다시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나는 다시 피렌체로 갔고 코피 때문에 열하루를 병원에 있었다.
엘레나는 뇌가 아니라 코에서 피가 터졌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하였다. 그것이 나중에 어떻게 될 지 그 때 나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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