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콜라레 회원들은 7~8명 정도의 그룹에 속해 있다. 우리는 책임자를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어 정기적으로 만난다. 코로나 19 이후 모임은 비대면으로 이어졌다. 그러자 사는 곳을 중심으로 구성되던 그룹이 전국으로 범위가 넓어졌다. 나도 서울, 경기, 청주, 세종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
신상에 변화가 생기면서 나는 책임자에게 먼저 소식을 알렸다. 그는 그룹 멤버들에게 알려 기도를 청하자고 했다. “아이고 뭐 그렇게까지… 큰 병이면 나중에 기도할 시간 많을테니 좀 기다리죠.”
1월 12일, 의사를 만나고 내 병이 후각신경아세포종, 비강암이라는 것을 알았다. 13일은 우리 모임이 있는 날이다. 그 날 내가 모두에게 직접 이야기하기로 했다.
보통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자신의 근황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 사람이 지난 보름동안 매우 힘들었다고 말을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의 사정이야기를 듣는 것이 어려웠단다. 뭐 암환자도 있고, 어려운 형편인 사람들도 있고… 나중엔 남편에게 “내가 왜 이런 쓰레기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나”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마지막 내 차례가 되었는데 나는 말이 나오지 않아 소소한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책임자가 오늘 하기로 약속한 말을 왜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러게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쓰레기라고 하는 말을 듣고 나니 난감해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 지 모르겠네요” ㅎㅎ 나는 병원에서 들은 이야기를 한 후, “이런 처지가 되고 보니 가난하든 무식하든 아프든 사람은 그냥 사람이라는 것만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 든다. 그리고 내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의 쓰레기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을 맺었다. 모임이 끝난 후, 나는 책임자에게 당분간 모임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안나 수녀님에게 내 소식을 전한 사람이 있다.
수녀님과 나는 박승호 교수님의 자본론 입문 수업을 같이 들으면서 알게 되어 수녀님이 논문을 쓰던 시기에 가까와졌다. 석사 과정을 마친 후 수녀님은 미국에서 2년동안 공부하다가 지난 12월 말 귀국하였다. 며칠 전, 수녀님이 밥을 사겠다고 학교에 왔다. 나는 연구실에 있던 다른 한명과 함께 나갔다. 이 친구도 내 상황을 잘 알고 있다. 수녀님은 사려깊은 사람이다.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다. 식사를 마치고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앉으며 나는 수녀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지 느꼈다. 내가 “아이고 나도 이럴 줄 몰랐는데… ” 하고 말을 꺼내자 옆에 있던 그 이가 “머 그거 부인 아냐, 부인? 처음에는 부정하다가 분노하고… 그러다 받아들이겠지…”하고 말을 자른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On Death and Dying에서 죽음을 선고받고 이를 받아들이기까지 사람들이 겪는 심리적 단계를 이론화한 정신의학자이다. 암이나 불치병을 선고받은 사람들은 부정-분노-타협-우울을 거쳐 죽음을 수용하게 된다고 한다.
이 사람은 석사과정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였으니 교과서에서 이 이론을 배웠거나 그의 책을 읽었을 수 있다. 악성 종양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아직 검사가 진행 중인 나에게 히히 웃으면서 어설픈 지식을 펼치는 그 이가 내게는 무신경하게 느껴졌다. 더 이상 같이 앉아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서 나는 수녀님에게 다시 만나자고 하면서 말을 접었다. 그래도 그 사람은 모른다^^ 내가 일어서면서 “자긴 좀 둔하잖아?” 하자 내가 왜 둔하냐고 한다. “자기가 둔하다는 것을 모르니 둔한 사람이지” 하고 그 자리를 끝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쉽게 마음에서 떨쳐지지 않았다. 나는 시민의식도 없고 사회에 대한 책임감도 없었다. 그저 다른 사람의 선의를 바랄 수 밖에 없는 처지에서 벗어나는 것. 내 힘으로 나와 가족을 부양하는 것. 다른 사람의 인내를 요구하는 약함이나 질병에서 벗어나 내 몸을 스스로 추스리는 것을 바랄 뿐이었다. 직장을 다닐 때 아프면 상사는 나에게 자기 관리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내겐 뼈아픈 말이었다.
사람들은 가난하거나 아픈 사람을 대할 때 자신이 마치 충고를 할 권리를 지닌 것 처럼, 우월한 존재인 것 처럼 느끼는 것 같다. 나는 꼼짝 못하고 그런 말을 들을 수 밖에 없는 무력감에 일생 괴로웠다. 그 슬픔과 분노는 가슴 밑바닥에 앙금처럼 고여 있을 뿐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 어떤 계기에 누군가 그 상처를 건드리면… 말 한마디 눈빛 하나에 그만 무언가가 폭발한다.
착찹한 심정을 나는 지난 한 주일 동안 페북에 풀어 내었다. 내 지난 삶을 거칠게 돌아보면서 나는 지금도 눈오는 마당에서 무력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개에게 짜장면 그릇을 들이대고 있던 그 사람을 여기저기서 다시 만났다.
나는 다시 한번 꺾이는 무릎을 곧추 세우고 땅을 딛고 일어서고 싶었다. 그 사람들은 생각없이 한 자신의 말을 기억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지난 수십년 간 내가 속으로 앙앙불락했던 많은 말들이 그러했듯이…^^
이런 일들은 내가 약해서 견뎌내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글을 쓰면서 그렇게 약한 나에게 괜찮다 괜찮다고… 억울하면 원한을 품어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자 나를 얽어 매던 원귀가 내게서 떠나가는 듯 했다.
비강암은 왜 생기나? 이리저리 검색을 하다 보니 외부의 강한 충격에 의해 생길 수도 있는데 원인이 시작된 후 십년 정도 지나 드러난다고 한다. 나는 피렌체의 병원에서 코에 말뚝을 박는 듯 했던 그 통증이 기억났다. 그 때가 2008년이었다. 어쩌면 이 병은 내가 아직도 치러야 하는 수업료인지도 모른다. 늘 그랬듯 나는 지금도 납부를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신경한 인간들이 함부로 내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을 용납할 생각은 없다. 반창고도 붙이고 필요하면 깁스도 해야 한다. 나의 글은 그런 각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앞으로 수술과 이어지는 치료과정이 내게는 새로운 도전이다. 병원에서 나오면서 이번 학기에 내가 하기로 한 강의를 대신 맡아줄 사람을 찾았다. 어제는 3월 1일자로 나를 연구교수로 위촉하겠다는 신학대학원 학과장을 만나 내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 분은 즉시 자신의 계획을 접으면서 내가 치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연구실의 화분도 적당한 사람을 찾아 나눠 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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