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생에 눈오던 날은 수백번이 넘겠지? 그러나 또렷하게 기억되는 날은 얼마 되지 않는다.
20살 무렵, 아버지는 성남 언덕배기 20평 분양지의 절반을 세얻어 중국집을 했다.그 때는 10대 초반의 남자아이들이 배달을 하던 때였는데 우린 그런 형편도 되지 않았다. 엄마 아버지는 주방에서 일을 하고, 나는 홀 서비스와 배달을 했다. 점심 시간에 주문이 오면 배달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까 배달갔던 집의 그릇을 찾아오곤 했다. 어느 눈오던 날, 그릇을 찾으러 갔더니 안주인이 먹다 남은 짜장면 그릇을 툇마루의 개 입에 대고 있고, 개는 남은 짜장면을 먹고 있었다. 방 안에는 손님인 듯한 부인이 앉아 있었다. 그 여자는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에게 개가 다 먹을 때 까지 기다리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안주인이 나를 보다 방 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개를 향하는 그 짧은 순간, 표정이 신비롭게 변하는 것이다.
나를 내려다 볼 때는 거만하고 위압적으로 ‘좀 기다리라’고 하더니, 방 안을 돌아보면서 손님에게는 양해를 구하는 우아한 웃음을...(왜 거기를 향해서? 눈을 맞으며 기다리는 건 난데) 그 다음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개를 바라보며 접시를 들이대는 것이다. (이 사람은 지 밥그릇에 개밥을 담아 주는걸까?)
그 마당에서 모든 생각을 다 한 것은 아마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장면을 오래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내 일생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람은 지가 좋아하는 개와의 교감이나, 뭔가 주고받을 것이 있는 사람들과의 교류에는 시간과 돈과 관심을 쏟지만 제 눈에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하찮은 상대에게는 ‘거저’ 지 본색을 다 내보이는구나. 나는 그냥 여기 이 바닥에 서서 사람들이 ‘공짜’로 내 보이는 본색을 꿰뚫어야겠다 싶었다.
내가 하이네의 ‘아스라’를 좋아했던 것도 이 경험과 닿아 있다. 예전에는 노예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앞에서 아무 수치심 없이 옷을 벗었다는 거 아닌가! ㅎㅎ 정도의 차이지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제 저녁, 어둠 속에서 차창 밖으로 날리는 눈발을 보며 생각했다. 다시 내가 선 자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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