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교 수료생들이 스승의 날이라며 꽃을 챙겨 왔더랬다.
차에서 내리려다 보니 좌석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꽃들...
내 거 하나,
오늘 오지 않은 동생 몫 하나,
내 차를 타고 오다 두고 내린 사람 거 하나.
카네이션이 세 송이다.
왜 갑자기 끼아라 관이 생각나지? 거리가 미어지던 인파, 추기경, 주교, 신부들이 가득하고, 귀빈들이 즐비했던 넓은 바오로성당... 의자가 놓여있는 곳 뒤로는 줄이 쳐지고 앞으로 가는 것을 제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뻬루쟈에서 새벽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러 나온 사람들이 종이상자를 하나씩 들고 온 이유를 그 때야 알았다. 일행은 아예 앞은 볼 생각도 않고 성당 뒷편 바닥에 종이를 깔고 앉았다. 앉을 종이상자도 없던 나는 까치발을 해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 때 성당 좌우에 세워진 스크린에 끼아라의 관이 비쳤다.
작은 성경과 카네이션 세 송이가 얹혀 있던 소박한 관... 세계로 퍼져 무수한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린 빛나는 이상의 씨앗은 추운 겨울 엄마를 위해 우유를 사러 나갔던 한 처녀의 단순하나 전적이었던 '네'에서 발아했다. 내 책상의 카네이션 세송이는 끼아라가 자신의 마음을 담았던 그 꽃과 닮고, 그렇게 일생을 불사른 그 마음을 기억하며 그의 친구들이 끼아라의 관 위에 놓았던 카네이션을 닮았다.
하지만 애들아, 너희는 다르단다.
너희는 내가 산 꽃도 아니고,
나는 자발적인 donatore가 아니다.
나는 버틸 수 있을 때 까지 한껏 버티고,
틈만 생기면 언제나 잽싸게 발을 뺀단다.
그렇게 꽃들에게 말을 걸자, 마치 답처럼 다른 영상이 떠오른다. 예수의 곁에는 그의 부름에 기꺼이 응한 제자들도 있었지만, 길 가에서 로마병정에게 걸려 얼결에 십자가를 진 키레네 사람 시몬도 있다. 나는 어려서 성서에서 그 부분을 읽을 때, 참 얼빵한 사람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체구만 장대하고, 누가 봐도 만만해 보이는 호구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그는 울부짖는 예수살렘의 여인은 아니었으나, 로마병정이 누군가 대신 십자가를 질 사람을 찾아 주위를 둘러볼 때, 그에게 시선을 맞추며 말없는 동의를 보냈던 것은 아니었을까?
수료생 모임 후 출발한 한국의 집에서 열리는 혼례식에는 지각을 했다. 종로, 청계천, 을지로의 교통통제로 네비 추정 20분 길을 한시간 십분 만에 도착했다. 식은 끝나고 신랑신부 앞에서 누군가 축가를 부르고 있다. 왜 결혼식은 그토록 아름답고, 하객들은 넘쳐나는거지? 아마 이렇게 빛나는 격려가 필요할 만큼 결단이 필요한 일인가 보다.
긴 하루의 끝에 상념이 이어진다.
댓글 0개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