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을을 몽땅 바쳐야 하는 일치를 위한 정치학교가 끝나갈 무렵 나는 다시 이태리어 공부를 시작했다. 수업 이틀 전, 이 동영상의 주소가 메일로 왔다. 숙제는... 이것을 듣고 알아들은 만큼 와서 설명을 하라는 것이다. 나는 이 짧은 이야기가 주는 강력한 매력에 사로잡혀 녹취록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수없이 반복해 들으며 적었지만, 쉼표도 마침표도 없고, 전치사, 관사, 접속사 다 빠지고, 원과거를 전부 현재형으로 써 놓은 글을 보고 나의 선생님은 빙긋 웃었다. 그 후 이 영상을 백번도 넘게 보면서 텍스트를 고쳤는데 그래도 끝까지 알아 들을 수 없었던 부분은 선생님이 메워 주었다.처음 조회 수가 1,400여 회였을 때 시작한 작업이 이제는 21,646회이다. 한시간에 1,000번씩 조회 수가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이것을 우리도 알아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글로 옮겼다.(감히 겁도 없이^^)
이 동영상을 보며 또렷해지는 기억 하나... 신영복 선생님의 '담론' 마지막 부분 '서울의 얼굴'이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었을 무렵, 신입자가 지하철에 대해 전혀 모르는 감옥의 동료들 앞에서 사설을 풀고 있을 때, 핀잔을 날리던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 사람의 서울에 대한 증오의 까닭을 신영복 선생님은 알고 있다. 그는 열세살 무렵, 열두살난 누이동생을 처음 상경한 서울역에서 잃어버렸다. 그리고 10년 후, 양동 창녀촌에서 그 누이를 만난다. 오빠를 먼저 알아본 동생이 달아나 버렸고, 그는 출소만 하면 그 동생을 잡아 죽이겠다고 각오를 다지고 있는 것이다. 선생의 상념은 이어진다. 그의 분노는 누이동생이 아니라 서울에 대한 분노이다. 선생은 그러나 서울은 잘못 겨냥된 표적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50호로 이루어진 A, B 두 마을에 각각 열두살의 사고무친한 어린 소녀를 투입하고 10년 후 확인한다. A마을에서는 여고를 졸업하고 농협직원이 되어 있고, B마을에서는 술집 창녀로 변해 있다면 두 마을의 차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이 이야기는 선생의 강의에서 그림으로 반복되고 있다. 책을 읽기 전에 나는 이 이야기를 강의로 들었다. 그 때 가슴 서늘하던 느낌이 동영상을 보며 되살아 났다.
사랑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저는 블레드 아르줄리 신부입니다. 제 삶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만났는지 말씀드리려 합니다. 저는 1977년 알비니아 피에리 시 한 무신론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1993년, 16세에 저는 일자리를 찾아 이탈리아로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공산주의가 무너진 후, 저의 부모님은 실직상태였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이들 처럼 국가를 위해 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간의 돈을 들여서, 가족의 부담을 덜고, 미래를 향상시키며,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위조여권으로 배를 타고, 아드리아해를 횡단하여, 집과 직장을 구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오뜨란토에 내렸습니다. (그러나) 배에서 내리자 마자 집과 직장(을 구하리라는 희망)은 사라졌습니다.
1993년 여름에 기차역에서 노숙을 하며 오뜨란또에서부터 피렌체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떠돌아 다녔습니다. 불법체류자라는 사실은 해결책을 찾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피렌체에 머물렀습니다. 제 고향사람이 여기 있었는데, 제게 말하기를 ‘피렌체에서는 무료로 먹고 잘 수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천국이었습니다! 실제로 저는 여러 달 동안 무뇨네(하천 변의) 다리 밑에서 자고, 바라까 거리의 까리따스 식당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저녁이면 습기차고 추운 곳에서 절망에 빠져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제 상황은 알바니아에서 보다 나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드리아해를 건너오는 비용으로 많은 빚을 졌기 때문에 되돌아 갈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무뇨네 (강)변에서 홀로 울부짖었습니다. 하느님은 절망의 부르짖음을 들었습니다.
저는 적선을 구하면서 피렌체의 여러 교회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황님이 미사를 드릴 스타디움 근처의, 산 제르바시오 교회(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한 사제가 단지 편지를 받기 위해 제게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아마 우편배달부로 생각한 듯) (그는) 동냥을 주지는 않았지만 제게 관심을 보였습니다. ‘넌 누구니? 뭘 하는거니?’ 노숙을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 머뭇거린 후, 그 사제에게 ‘저는 16살이고 다리 밑에서 노숙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말도 안돼....이런 상황은.’라고 말한 신부님은 어떤 해결책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를 했으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내일 돌아 오너라. 널 위해 대책을 마련해 놓으마’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제가 찾아갔을 때 그 분은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게 ‘어린 아들아, 내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문을 두드린 것이다. 내 집에 와서 머물러라’라고 말했습니다. 그 분은 저를 자신의 집에 맞아 들여 주었습니다. 하루나 한 달이 아니라 9년간 저를 자신의 아들처럼 돌봐 주었습니다.
2002년 말, 신부님은 이 곳에서 고통스런 긴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잔 까를로 세띠 신부는 제게 영신적인 아버지일 뿐 아니라 (육신적인) 아빠로서 진정한 가정에 저를 맞아 주었습니다. 그 분은 제가 일자리를 찾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저는 5년 동안 주유소에서 일했고, 비자를 마련했으며, 다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상업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등록을 했습니다. 다국적기업의 매니저로 직업도 바꾸었습니다.
사제관에 머물고 생활했지만 저는 무신론자의 나라에서 왔습니다. 일요일이면 16살이던 제 또래의 소년들과 축구장에서 놀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11시가 되면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다들 미사에 갔기 때문입니다. 교황님, 제가 처음 미사에 간 것은 혼자 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사가 참으로 좋았습니다. 잘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특히 복음이 좋았고, 가족과 멀리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는 노래가 감동적이었습니다. 미사의 구조는 단순했고, 두어번 주일미사에 참석한 후, (과정을 다 파악했으므로) 저는 성체를 영하기 위해 줄을 섰습니다. (미사예절)을 다 따른 후 (영성체를 하는 것은) 제 생각에 당연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쎄띠 신부님은 제게 성체를 주지 않고, 어깨를 밀어 냈습니다. 저는 몹시 언짢아서 제의방으로 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왜 내게는 성체를 주지 않았어요?’ ‘ 넌 영세를 받지 않았으니까’ ‘당장 영세를 주세요. 뭐가 문제죠?’ ‘안돼, 교리문답을 배우고 준비를 해야 해’ 저는 크게 기뻐하며 그 분에게 ‘ 교리문답 준비를 시켜 주세요’라고 말했어요. 혹시 16살 짜리 어린애가 뭔가를 원할 때, 허락이 필요한가요? 전 모르겠어요.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직장과 야간학교에서 돌아오는 저녁마다 교리문답(공부를)를 시작했습니다. 1994년 부활절에, 성인의식으로 저는 세례성사와 견진성사, 성체성사를 받았습니다. 제가 세띠 신부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다면, 두 번째 만남은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를 통해서였습니다.
저는 차츰 차츰 (이 순간이) 도착점이 아니라 제 삶의 새로운 출발점이라는 것을 깨달아 갔습니다. 2000년 희년에, 일하면서 공부하던 한 젊은이는 삶의 (새로운) 출발점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제직에로의 부르심을 느꼈습니다. 대학(공부)를 중단하고 신학교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세띠 신부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서두르지 않으셔. 시작한 공부를 끝내렴. 너의 성소는 분명해질거야’ 유감스럽게도 2002년, (신부님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의 권고를 따랐습니다. 먼저 (대학을) 졸업한 후, 2003년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제 삶에서 경이롭고 아름다운 7년간의 양성(과정) 을 거쳤습니다.
2010년부터 저는 피렌체 교회의 사제입니다. 저를 가족처럼 맞아 준 공동체인 산 까시아노 교회의 보좌신부로 5년을 보냈습니다. 올해 1월부터 추기경님은 생동감있고, 너그러우나, 사목적이고 영신적인 업무가 부족하지 않은 비첸찌오의 성 마리아 성당을 제게 맡기셨습니다. 모든 형제 사제들이 그러하듯이, 주교님이 서품식 날 하신 복음의 ‘(신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살아라’라는 말씀을 따르면서 매일 그 충고를 (가슴에) 지니고 형제들과 하느님께 기쁘게 그러나 또한 노고 속에서 봉사하며 살고자 노력합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의 관대함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가까운(이들과)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저의 응답이 너그러움에 있어서 (그들 보다)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2년이 지난 지금, 예수 그리스도에 기초한 이 회합의 교황님 앞에서, 그 날 제가 문을 두드렸을 때 , ‘ 그리스도가 내 문을 두드렸다’고 말했던 신부님을 생각하면서 저는 새로운 인본주의에 대해 확언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그리스도는 문을 두드리는 사람 안에서가 아니라 문을 열어주는 사람 안에서 드러납니다. 교황님이 교회와 전 세계를 향해 ‘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자비의 희년이 시작되는 오늘날에도 역시 그러합니다.
알바니아 교회만이 아니라 온 나라에 용기를 주었던 교황님의 알바니아 여행에 대해 알바니아 인으로서만 감사들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회합은 국제적이며 교회를 알고 있는 많은 사람(안에서) 살아 숨쉬는 회합이 될 것입니다. 제가 여기에 오는 것을 알게 된 친구, 가족들과 많은 사람들이 교황님께 무언가를 말해 달라고 청했으나 그것을 간추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 특별한 순간 저는 단지 ‘사랑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당신을 정말 좋아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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