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선 글라라 경험담(202207)
2남 2녀의 장녀인 저는 20대 초반이던 1980년 포콜라레를 알게 되었어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어려워져 10대 중반에 학교를 중퇴하고 아버지를 돕기 시작한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형편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고 동생들과도 종종 부딪치곤 했던 저는 포콜라레의 이상을 만나면서 삶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습니다. 막내동생이 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포콜라레 회원들의 도움과 격려로 검정고시를 보았고, 그 공부가 밑천이 되어 공무원시험에 응시하여 34살에 직장을 갖게 되었는습니다. 대학공부를 시작한 것은 집안의 빚을 다 갚고 난 사십대 중반이었습니다. 당시 지방자치단체장을 민선으로 선출하게 되자 후보 중 한 사람이 자신이 시장이 되면 시청 내에 공무원을 위한 대학을 개설하겠다고 약속하였고 당선 후 시청 내에 대학과정이 개설되었습니다. 교수님이 근무시간 후 시청으로 와서 강의를 하였고, 학비도 지원이 되었으니 제게는 좋은 기회였어요. 다만 저는 인문학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이 과정은 경영학 한 가지 뿐이라는 것이 아쉬웠지만 제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려운 회계원리와 생소한 경제이론에도 불구하고 제 안에서 학교공부가 차츰 EoC와 연결이 되었습니다.그 무렵은 국회의원들과 모임이 시작되던 시기였는데 정치와 행정은 같은 카테고리이고 제가 공무원이니 MPPU의 일을 도와달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낮에 근무하고 밤에 공부하는 제게 MPPU의 일은 버거웠지만 한편으로는 공부의 가치를 깨닫고 계속할 수 있는 자극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대학과정을 접해 보고 싶어 시작했던 공부였는데 졸업 후 대학원 진학을 권유받게 되고, EoC에 대한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이태리어를 알아야 한다는 조언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학원을 휴학하고 이태리어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2007년 말, 뻬루쟈로 어학연수를 갔고, 2008년 개교한 소피아대학원에 입학하여 2년 동안 공부를 하였습니다. 2010년 귀국하여 한국의 대학원에 복학을 하여 2013년, EoC를 주제로 석사논문을 썼습니다. 당시 저의 희망은 정년까지 직장에 다니면서 저축하여 학비를 모았다가 퇴직후 공부를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2014년 10월, 성남시청의 기업지원과에서 제가 맡은 업무 중 하나는 막 조성이 끝나가는 판교테크노밸리 관리도 있었습니다. 한 지방신문사에서 축제를 기획하였고, 성남시장에게 축사를 부탁하여 저도 그 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 날 축제를 보려던 사람들이 올라가 있던 환풍구가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사망자는 17명이었고, 부상자도 다수 발생하였습니다. 수습을 위해 정신없이 바빴던 몇 달이 지난 후, 사망자들이 떨어지기 직전 바로 그 곁을 지나갔던 저는 그제서야 이 사건에 대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한순간에 세상을 떠날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지금 죽어도 좋은 그 일을 하고 있는가? 퇴직을 할 때까지 돈을 모으려고 하는 것은 시간을 팔아 돈을 사는 것인데 그 기회가 내게 주어질지 어떨지는 불확실하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지금 당장 돈을 팔아 시간을 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5년 초, 저는 명예퇴직을 하였습니다. 저는 2016년 3월에 성공회대학원 사회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였고, 같은 해 5월에는 루이지노 브루니 교수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대중강연을 하였습니다. 강연 준비를 통해 알게 된 한국 사회적경제 분야의 활동가와 연구자들의 반응을 보며 저는 EoC가 한국 경제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게 되었고 루이지노 방한을 계기로 연결된 연구자들과 함께 공동번역을 시작하였습니다. 2020년 11월에는 9명의 공동번역자가 La ferita dell'altro를 “콤무니타스 이코노미”라는 제목으로, 12월에는 제가 번역한 La foresta e l'albero가 “숲과 나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2022년 2월에는 저의 박사논문이 통과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시민경제 사상과 한국 친교경제 EoC 기업사례 연구”라는 제목의 이 논문에는 한국의 EoC기업 10개의 사례가 실려 있습니다. 제가 몇 년 동안 다른 사람들의 심사과정을 보니 박사학위논문은 두 번이나 세 번 정도 심사를 거친 후 통과가 되는데 심사를 할 때마다 심사비가 들었습니다. 저는 논문의 완성도를 높인 후 심사를 받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되었고, 저의 논문은 첫 번째 심사에서 통과가 되었습니다. 저는 한 번의 심사비에 해당되는 금액을 나누어 사업회와 제가 속한 성공회대사회과학연구소에 내어 놓았습니다. 사회과학연구소는 성공회대학원 사회학과 박사들의 공간인데 금액은 적었지만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좋은 생각이라고 자신도 돈을 내놓겠다고 하는 사람도 생기고, 그 돈을 연구지원비로 청하는 사람도 나타났습니다.성공회대학교에서는 박사학위를 받으면 강사로 채용해 한 학기 강의를 할 기회를 줍니다. 저도 학과장님으로부터 2022년 가을 학기에 제 논문으로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강사채용 공고를 보니 연령제한이 있었습니다. 2022년 9월 1일 현재 만 65세 미만이어야 하는데 저는 지난 3월 만 65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학교의 인사위원회에서는 저를 강사가 아니라 대우교수로 채용하여 강의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같은 학기에 공동번역자 중 한 분인 유철규 교수님도 사회적경제대학원에서 “시민경제”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학부와 대학원에서 각각 EoC에 대한 강의가 개설되는 것입니다. 현재 진행 중인 공동번역에 참가하고 있는 이은주 박사는 한국학술재단에 제출한 제안이 채택되었습니다. 내용은 루이지노 브루니 교수의 “상호성”이론으로 서울 광진구의 사회적경제 기업들 사이의 관계와 협력을 분석하는 것입니다. 역시 공동번역자인 이가람 박사는 올해 9월 아씨시에서 열리는 프란치스코 경제에 참가신청을 하였습니다. La ferita dell'altro가 “콤무니타스 이코노미”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자 성공회대학교의 사회적경제대학원장님은 과의 기금으로 책을 사서 1기부터 현재까지 수료생과 재학생들에게 나눠주고 두 달에 걸쳐 세미나를 하였고, 그 후 자신의 강의에 참고도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2021년 이후 한국에서 새로 발간되는 사회적경제 관련 서적에도 이 책은 인용이 되고 있으며 “숲과 나무”는 국회도서관에 소장된 루이지노 브루니의 책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읽은 책입니다. 지금은 루이지노 브루니 교수의 L'ethos del mercato로 두 번째 공동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 그룹에는 젊은 연구자 두 명이 새로 합류하였습니다. 저는 공부를 하면서 한국 학계 담론의 장에 EoC가 발을 들여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곤 하였습니다. 아직은 미미하지만 한국의 학계에 조금씩 물길을 열어가고 있는 EoC를 통해 이상의 빛 또한 퍼져나갈 것을 믿으며 이 모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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