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거야?' '안 가' 묻는 사람마다 번번이 그렇게 대답했는데...갔다. 들어서니 오른쪽으로 책이 있고, 옆에 파이만주가 쌓여 있다. 역시 나란 인간은... 책은 찍지 않고 먹을 것만 찍었군. 방명록도 있고, 4층 입구는 아기자기하다. 방을 들어서니 익숙한 얼굴들... 미사, 클라리따와 아오스딩의 간략한 인삿말, 오랫만에 한국에 온 popa들 인사, 떡케익 커팅, 그리고 다과가 차려진다. 나는 테이블 세팅이 끝나기도 전에 얼른 과일꼬치 하나 들고 자리를 빠져 나왔다.
언제나 처럼 뒷북치는 나... 사진을 보니, 어제의 장면에 이어 오래된 기억이 따라 나선다.
여러 해 성당에 발을 끊었던 나는 무슨 맘이 들었는지 어느날 미사에 갔고, 영성체 후 묵상에 맘이 끌렸다. 그게 듣고 싶어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갔다. 매일 다른 내용이었지만 같은 기조였고, 아직까지 접해보지 못한 색다른 울림이었다.
몇 달이 지난 후, 성당에서 내 옆자리의 젊은이가 들고 있는 책에 눈길이 갔다. 잠깐 볼 수 있느냐고 묻자, 신부님에게서 빌린 책이라서 안된다고 한다. '웃겨~ 신부님이 일기장이라도 빌려 줬다면 모를까 책인데 신부님이 빌려줘서 안된다구?' 나는 표지와 제목을 다시 눈여겨 보았다.
며칠 후, 명동의 성 바오로서원에서 같은 책을 발견했다. 영성체 후 그토록 내 맘을 끌었던 묵상이 바로 거기 다 실려 있었다. 잉~ 그럼 그동안 신부님은 이 책을 읽었던거네? 책의 표지 다음 장에는 보라색 스탬프로 윗줄에 큰 글씨로 '국제 마리아의 사업회' 다음 줄에 작은 글씨로 주소와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무슨 사업을 하는거예요?' 전화를 받은 사람은 한달에 두번 모임이 있다며 다음 모임이 있는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었다. 장충체육관 건너편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신당동 성당으로 꺾어지는 길 모퉁이에서 기다리는 나를 누군가 데리러 왔다. 주택가의 한 집 지하실에는 모임 전 미리 도착한 사람들이 띠지에 주소를 쓰고 있었다. 노는 입에 염불인가 보다. 매달 발송하는 생활말씀의 주소였다. 한쪽에는 책도 몇 권 있었다. 나는 보이는 책을 한권씩 모두 샀다. 여기가 뭐하는 곳인지 이 책을 보면 다 알 수 있겠지? 이 만남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나는 이날을 기억하기 위해 책에 날짜를 적어 놓았다. 1980년 10월 24일. 날짜를 적어 놓은 것은 잘 했어. 그렇지만 책을 읽어서 알 수 있을거라는 건 착각이었지^^
그 후, 얼마나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그 지하실을 드나 들었던가! 일거리가 없을 때는 구석에 쌓여있는 묵은 월간지를 읽었다. 오래 전 등사판으로 긁은 '소식'도 있었다. 이제보니 Silvana Veronesi의 ERANO TEMPI di GUERRA...다. 이 어린 소녀의 목격담에 매혹된 나는 누렇게 변색된 '소식'지를 빌려와 연재된 이 이야기 전체를 당시 막 배우기 시작하던 아래아로 컴퓨터에 입력했다. 삼십년 쯤 후, 이태리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마치 이태리어를 줄줄 읽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내용을 거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업회는 우리나라에 발을 딛은 첫 순간부터 인쇄를 통해 민들레 홀씨를 날려 왔던 것이다. 지금도 이 홀씨는 누군가의 가슴에서 노랗게 피어나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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