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미완성이 주는 구원
“제자들은 올리브산에 함께 앉아 이 말씀들을 생각하며, 큰 기쁨에 넘쳐 서로 즐겁게 말하였다. ‘우리는 이 땅의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복된 이들이다. 구원자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드러내셨고, 우리는 충만함과 온전한 완전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피스티스 소피아』(Pistis Sophia), 제1권.
마지막에서 두 번째인 이 장에서, 우리는 사람과 공동체에 관한 끈질긴 논의를 이어 가며 마무리하려 한다. 이 논의에 생기를 불어넣고 영감을 주는 것은 성경이다. 성경은 이 책 전체의 저변을 흐르는 강이다.
지혜 전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전통은 공동체에도 귀중한 통찰을 제공한다. 지혜는 성경을 관통하는 황금실이며, 가장 질긴 실 가운데 하나다. 그리스에서 소피아와 필로소피아로 나타난 정신은 비슷한 시기에 이집트와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지혜로 꽃피었고, 성경의 문헌들에서 더없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철학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경이에서 출발한다. 반면 지혜는 감각으로 감지되는 현실보다 더 깊은 현실을 발견하는 데서 태어난다. 그 현실에는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는 남다른 말들이 담겨 있다. 지혜 안에서도 인간은 경이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 경이는 눈 앞의 현실 너머에 숨은 깊은 의미를 발견하는 데서 시작된다. 지혜에는 자연의 때와 리듬에 새겨진 슬기도 포함된다. 새의 둥지를 알아보고, 쟁기나 오토바이를 고치며, 소금을 ‘알맞게’ 넣는 법을 배우는 데에도 지혜가 있다. 지혜는 땅처럼 낮고 흙처럼 겸손하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시작해 삶의 깊은 의미로 나아간다.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다가, 어느 특별한 날 그 익숙한 자리에서 하느님의 향기를 느끼게 한다. 삶의 향기이자 하느님과 그분의 영들의 향기다. 성경의 인간은 다른 아담을 꿈꾸는 사람이다. 남다른 하느님께서 그를 꿈꾸셨기 때문이다.
이 지혜는 성령과 함께 성경의 여러 대목을 쓴 저자들의 손을 이끈 숨결이다. 그중 한 대목을 열왕기에서, 특히 다윗 임금의 아들 솔로몬에 관한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통치와 삶이 그리는 궤적은 성경의 지혜에 비추어야만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이 통치 초기에 청한 것에 넘치도록 응답하시어 지혜를 선물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매우 큰 지혜와 총명을 주셨다. […] 그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웠다”(1열왕 5,9–11). 그 지혜로 “솔로몬은 모든 왕국을 다스렸다”(1열왕 5,1). 그리하여 열왕기는 영광과 영화의 절정에 이른 솔로몬의 모습을 먼저 보여 준다(1열왕 4,20).
그러나 계속 읽다 보면, 성공의 절정이 솔로몬의 쇠퇴가 시작되는 순간과 맞물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느 날 그 지혜로운 왕은 자기 삶의 가장 큰 재능인 지혜를 잃었다. “솔로몬이 늙었을 때 […] 그의 마음은 주 그의 하느님께 온전히 속하지 않았다. […] 이렇게 솔로몬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고,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다”(1열왕 11,4–6).
성경은 가장 지혜로웠던 왕의 도덕적 쇠퇴가 왜 시작되었는지 말해 주지 않는다. 어쩌면 침묵 속에서 중요하고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많은 지혜로운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길을 잃는다. 바른길을 벗어나고도 한참 동안 여전히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솔로몬의 쇠퇴를 다룬 이 장들을 지혜와 샤밧에 비추어 읽으면, 유일한 단서는 아니더라도 중요한 실마리 하나가 드러날 수 있다. 솔로몬이 자신의 걸작인 예루살렘 성전을 완성하기로 했을 때 쇠퇴가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시작하여 완성하였다”(1열왕 6,14). 바로 여기서 앞서 살펴보고 논의에 활용했던 희년과 샤밧의 문화가 다시 중요해진다. 미완성과 불완전함은 성경적 인간 이해의 근본적인 차원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백성을 해방하는 위대한 일을 이루었지만, 약속의 땅에 이르지 못한 채 죽었다. 성경은 족장들과 다윗, 모세를 불완전한 사람으로 묘사한다. 여성 족장들과 성경의 많은 여성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잘못과 한계로 가득하고 불완전하기에 아름답다. 성경이 그리는 거룩함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흠 없는 성인의 모습과 다르다. 불완전함 안에서 이루어지는 완전함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이야기를 우리 자신과 공동체, 카리스마 운동에 연결해 보자. 성경의 지혜에 비추어 보면, 앞서 살펴본 현상들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어느 날 우리는 자신의 가장 큰 사명, 삶의 걸작이라고 여기는 일을 발견한다. 이 놀라운 발견과 계시와 함께, 그 일을 완수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꽃피우고 실현하는 길이며, 그 성소를 이루는 데 행복이 있다는 확신도 생겨나 자란다. 그때부터 우리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힘을 모두 그 목적에 쏟는다. 달리 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특히 젊은 시절에는 그렇다.
그러나 훨씬 뒤의 어느 날, 때로는 새로운 사실을 직감한다. 우리가 세우고 있는 그 걸작 안에 구원과 함께 패배도 숨어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렴풋이 깨닫는다. 그 아름다운 사명이 세월 속에서 ‘풍요의 저주’가 되었고, 젊은 시절의 큰 은총이 자신을 옭아매는 굴레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이 깨달음은 확신할 만큼 뚜렷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서 찾아오는 순간, 우리는 흔히 과거와 그 선물과 사명을 저주한다. 갑자기 자신이 그것들의 종이나 노예가 되었다고 느낀다. 자신을 속이고 삶을 빼앗은 주인처럼 여기는 것이다. 그러다 또 다른 날, 참으로 경이로운 날이 온다. 그 기만 안에도 축복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고통 속에서 지금 우리가 삶의 큰 비밀이라고 느끼는 것을 깨닫도록 해 준 축복이었다. 그때 새로운 기도가 태어나고, 하느님께, 적어도 삶에 참으로 감사하는 법을 배운다. 마음의 샤밧이 찾아온 날이다. 특별하고 눈에 보이지 않으며, 온전히 내밀하고 은밀한 샤밧이다. 씨앗이 좋은 땅에 뿌려져 받아들여지고 지켜졌다면, 때가 무르익었을 때 더없이 아름다운 꽃처럼 자연스럽게 피어난다. 그것은 강렬하고 고통스러운 빛으로 찾아온다. 과거보다 미래를 더 밝히는 빛이다. 과거와 미래의 결실에 매이지 않고 좋은 삶을 이어 갈 유일한 길을 가리켜 주기 때문이다.
드물지만 꼭 필요한 이런 순간에, 우리는 마침내 인간 삶의 신비로운 법칙 하나를 이해한다. 가장 참된 법칙 가운데 하나이며, 지혜를 가까이할 때에만 드러나는 법칙이다. 삶이 우리에게 큰 재능들을,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귀중한 재능 하나를 주었다면, 성숙한 어느 날에는 그 재능을 발휘하는 일이 오히려 삶의 본질적인 무언가를 앗아 가기 시작한다. 특히 그 재능이 종교적·예술적·학문적·가족적 성소일 때 더욱 그렇다. 우리는 예고도 없이 결정적인 갈림길에 선다. 한쪽에는 지금까지 거둔 성공을 계속 키워 갈 수 있는 넓고 내리막인 길이 있다. 다른 쪽에는 훨씬 좁고 험하며 오르막인 길이 있다. 그 이름은 ‘자기전복’이다. 이 두 번째의 소박한 길은 이렇게 말한다. “성공을 마지막까지 소모하지 마라. 재능을 끊임없이 쥐어짜지 마라. 마음 한쪽에는 경작하지 않은 땅을 남겨 두어라. 재능이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에 그것을 자유롭게 놓아주고, 젊음의 첫날처럼 가난하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다시 시작하여라. 이 땅에서의 여정을 가벼운 마음으로 마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샤밧을 지켜라.” 시인 ‘마리오’가 시인이라는 역할보다 마리오라는 사람 자체가 더 귀하다는 것을 깨닫는 날이다. 젊은 시절 우리를 날아오르게 했던 성소와 재능이, 성숙한 뒤에는 어느새 무거운 짐이 되었음을 알아차린다. 여정을 이어 가려면 그 재능에 감사한 뒤 바다에 던져 버려야 한다는 것도 깨닫는다. 우리는 성소를 받기 전의 자리로 돌아가, 처음에 있었던 무언가를 찾는다. 그것이 여전히 남아 있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비가 애벌레에게, 부활한 이가 십자가에 못 박힌 이에게 감사하는 날이다. 그러나 결코 과거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성소와 재능, 가장 큰 사명은 어느 날 우리가 남다른 절제를 발견할 때 완성된다. 자신의 성소와 재능을 끝까지 소모하지 않는 절제다. 늘 살던 집에 그대로 머물더라도 그렇다. 우리는 이 미완성이야말로 성소의 완성임을 깨닫는다. 어쩌면 공동체와도 화해하게 된다. 젊은 시절 들어갔던 때보다 빛과 예언자적 힘이 약해진 그 공동체가, 실은 바로 그렇게 자신의 사명을 이루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 샤밧의 핵심은 새로운 형태의 절제에 있다. 이제는 우리의 재능을 자신을 위해 계속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자기 삶의 ‘파라오’가 되어 그 생명을 꺼뜨린다. 평생 순수함과 정결을 추구해 온 뒤에야, 참으로 본질적인 정결은 전혀 다른 것임을 깨닫는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대하는 정결이다. 영혼과 아름다움까지 모두 수익을 내는 데 동원하여 자신을 집어삼키지 않게 하는 태도다. 정결은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탐욕스럽게 소비하지 않는 것임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소모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마침내 일곱째 날, 일곱 번째 안식의 때, 참된 무상성의 시간이 왔음을 깨닫고 우리는 말한다. “샤밧 샬롬.” 더 이상 수익을 내도록 몰아붙이지 않고, 사십구 년 뒤에는 마침내 쉬게 해야 할 땅은 우리의 마음이다. 해방해야 할 노예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런 다음 많은 발견이 시작된다. 모두 이 마음의 샤밧에서 태어난 발견들이다.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교향곡은 미완성 교향곡이며, 참된 걸작은 우리가 구상하고 바라던 형태로 완성하지 못한 작품이다. 가장 아름다운 책은 우리가 쓰지 않았고 앞으로도 쓰지 않을 책이다. 이 샤밧은 끈질기게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이다. 자신이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대신, 자신이 빚어지도록 내맡기는 시간이다. 온유함의 시간이며, 마음의 등을 어루만지는 착한 목자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시간이다. 성숙한 지혜가 선물로 주어지는 날이다.
이러한 이치는 오직 지혜만이 가르쳐 줄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일보다 더 크고 아름답다. 우리의 재능과 사명, 걸작과 공동체, 심지어 성소보다도 더 크고 아름답다. 우리는 쓸모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와 그 성전들에 유용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조차 아니다. 샤밧은 이 모든 것을 가르쳐 준다.
공동체의 절제(정결)
샤밧에 관해서는 아직 더 할 말이 있다. 샤밧은 이 책의 여러 분석을 이해하게 하는 성경적 해석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여러 관점에서 샤밧을 살펴본다. 샤밧은 성경적 인간 이해의 핵심이다. 서로 긴밀히 얽혀 있는 지혜와 함께, 구약과 신약 전체를 관통하는 깊은 정신이자 누룩이며, 성경이 하느님과 관계,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이해하게 해 준다. 따라서 샤밧은 카리스마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의 신비에 다가가는 중요한 열쇠이기도 하다. 우리는 얼마 전 희년을 지냈지만, 희년과 안식년의 정신인 샤밧에 관해서는 충분히 성찰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1]
성경의 예언자들은 샤밧을 바라보는 고유한 시선을 지닌다. 여기서도 그 시선은 율법의 시선과 다르다. 율법, 곧 토라는 본성상 일곱째 날의 특별한 규칙들을 샤밧에만 한정하고, 그것들이 예외로 남도록 하려 한다. 반면 예언은 일곱째 날의 희년적 법을 한 주의 모든 날로 확장하려 한다. 시민과 이방인, 인간과 자연, 자유인과 노예 사이의 평등 같은 안식일의 예외는 율법에서 예외로 남아야 한다. 그러나 예언에서는 앞으로 도래할 나라의 원칙이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둘러싸고 벌이신 논쟁은, 안식일이 일곱째 날의 울타리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지키던 체계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이다. 복음의 예언은 영원한 안식일이다. 그 안에서는 우주적 형제애가 새로운 법의 황금률이 된다.
나자렛 예수님은 샤밧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샤밧은 그분이 선포하신 나라의 법, 무상성, 들의 나리꽃과 하늘의 새까지 품는 보편적 형제애와 깊이 들어맞는 성경의 제도이기 때문이다. 샤밧은 그분이 선포하신 새로운 세계를 미리 보여 주는 보증이었다. 끊임없이, 영원히 이어지는 샤밧이다. 그곳에서는 자유인과 노예, 남성과 여성, 인간과 동물, 우리와 땅 사이에 차별이 없다. 일곱째 날은 모든 날이 품은 예언의 완성이다. 그렇다면 복음서들은 왜 예수님께서 샤밧의 규정을 거듭 어기셨다고 전할까?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제자들은 길을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3–24). 요한 복음에도 이런 대목이 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 그런데 그날은 안식일이었다”(요한 5,8–9ㄴ). 이 밖에도 예수님께서 샤밧과 모세 율법의 다른 규정들-예를 들어 단식 규정-을 거듭 어기시는 모습을 보여 주는 일화는 많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그분의 공동체에 샤밧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우리 공동체에는 무엇인가?
하늘 나라는 모든 종교로부터의 해방이다. 성경의 깊은 논리에 따르면, 샤밧은 계약이 다른 민족들의 종교와 같은 것으로 변하지 않도록 지키는 영적 장치였다. 성경 전체는 자신의 하느님 야훼를 주변 종교들의 논리에서 해방하려는 끈질긴 시도다. 우리가 알듯이,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율법, 곧 토라도 주셨다. 그러나 이 율법은 다른 모든 법과 달랐다. 특히 샤밧과 그에 따른 안식년과 희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역설적이고 예언자적인 법은 토라를 다른 종교들의 규범과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들어 주어야 했다. 엿새와 일곱째 날 사이에는 율법과 예언자 사이에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역동적 긴장이 있다. 신약성경은 이를 모세와 그리스도의 대비로 집약한다. 성경의 예언에서 샤밧은 율법의 예외가 아니라, 율법 자체가 품은 예언이다. 토라를 단순히 한 종교의 기초 문헌에 머물지 않게 하는 힘이다. 그런데 샤밧마저 율법의 명령이 되고, 율법을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종교 규정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여진다면, 더 이상 소금도 누룩도 되지 못한다. 고유한 힘을 잃고 종교의 법적 성격을 강화할 뿐이다. 예수님께서 접하신 유다교, 적어도 반유다교적 논쟁의 흔적이 배어 있는 복음서들이 전하는 유다교는, 바로 이 샤밧의 전복적이고 예언자적인 의미를 잃어버린 듯하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야훼의 선물을 하느님을 위한 것이라는 명목으로 인간을 구속하는 규정으로 바꾸었다는 사실을 보셨다. 이는 모든 종교에서 매우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상상한 봉헌을 위해, 실제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으로 변하곤 한다.[2]
종교가 규정한 샤밧에서 해방하시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그분의 교회와 과거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공동체들을 향하기도 한다. 복음과의 만남은 율법에 매인 모든 종교에서 우리를 해방한다. 그리스도교 자체도, 각 그리스도인이 만들어 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념과 이데올로기도 예외가 아니다. 예수님을 둘러싼 종교의 틀에서까지 벗어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분을 만나고 그분의 아가페의 나라를 발견하기를 희망할 수 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메타노이아, 곧 삶의 방향을 완전히 돌리는 회심이다. 이 회심이 이루어지면 우리는 다른 세계, 새로운 도시에 들어선다. 그 나라는 종교가 아니다. 모든 의례적 숭배에서 해방되어 영의 시대로 들어가는 것이다. 메타노이아를 이렇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복음에 다가갈 수 없다. 바오로를 이해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따라서 아가페의 나라는 무엇보다 종교가 신자들의 어깨에 지우는 짐에서 벗어나는 해방이다. 이미 종교 안에 있는 사람이 예수님과 그분의 메시지를 만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나 다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메타노이아를 이루고 영 안에서 다시 태어나, 어린아이처럼 새롭게 믿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본질적인 과정은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서 여러 차례 반복된다.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도 이내 자신의 우상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공동체나 운동, 어떤 사람, 혹은 우리 자신이 그 우상이 된다. 날마다 그것을 부수고,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은 가느다란 목소리를 새롭게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교를 이 땅의 수많은 종교 가운데 하나로, 크고 작은 제국의 모습으로 바꿀 때마다, 그리스도교는 변화와 해방의 힘을 모두 잃었다. 율법이 영을 지배하고, 복음은 윤리 논문과 고해 사제를 위한 지침서, 금지 목록으로 바뀌었다. ‘풀어 주기’보다 ‘묶기’ 위한 것이었다. 누가 제국의 경계 안에 있고 밖에 있는지 규정하고, 파문하며, 거룩한 성채의 경계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복음서를 읽을 때에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갈등을 빚으신 서기관과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그분이 살던 시대의 인물들만이 아니다. 이들은 모든 종교가 만들어 내는 율법과 종교, 신학의 대변자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복음에서 탄생한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려 하신 것은 오직 새로운 나라, 영원한 샤밧이었다.
성경적 신앙의 출발점에는 해방의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신앙을 해방으로 읽지 않을 때마다, 우리는 야훼나 예수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사실은 우상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그 최초의 해방은 점차 의례와 전례, 교리와 윤리적 규정, 사제 계층을 만들어 낸다. 하느님을 대변하는 사람들은 그분을 인간의 희생을 먹고 사는 우월한 존재로 상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커지시려면 우리가 작아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렇게 종교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제로섬 게임’이 된다. 인간의 고통이 하느님의 기쁨이 되고, 하느님의 기쁨은 인간의 고통이 되는 것이다. 모든 회심은 “샤밧 샬롬”으로 시작된다. 앞선 엿새의 짐에서 벗어난 새로운 날, 시간도 희생 제사도 없는 빈 성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야 한다. 다른 사람과의 모든 중요한 만남은 “샤밧 샬롬”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평소와 다른 날로 들어서는 일이며, 신비를 맞아들일 준비여야 한다. 모든 사람 안에 담긴 신비, 타인의 신비를 맞이하는 것이다. 이 태도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바람직하지만, 영적·카리스마 공동체에서는 필수적이다. 우리가 모든 ‘형제’와 ‘자매’ 앞에서 “샤밧 샬롬”이라고 말할 줄 알고, 신비 앞에 서 있음을 의식하며 그 신비를 존중하고 지킬 때, 공동체는 좋은 삶을 살아간다. 관계 곳곳에 숨은 수많은 함정에서 사람들을 참으로 해방하는 곳이 된다. 이러한 존중은 가족과 친구 사이에서는 언제나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필수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카리스마 공동체와 영적 공동체에서는 없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함께 살며 식탁과 일, 성가대석을 나눈다. 전례와 기도에서도 어깨를 맞댄다. 깊은 친밀함과 형제애, 자매애 속에 살아간다. 이것은 우리가 매 순간 함께 만들어 내는 ‘관계재’이며, 아침마다 빵과 우유처럼 우리를 먹여 살린다. 그러나 수년, 수십 년 곁에서 살아온 사람 안에도 내밀한 신비가 있으며, 그 신비의 상당 부분은 나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심지어 그 사람 자신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으면 공동체는 시들어 간다. 단테의 위대한 시가 우리에게 선물한, 서로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경험-“네가 내 안으로 들어오듯 나도 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천국편』 9곡, 81행)-은 천국의 삶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언제나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경험이다. 따라서 타인의 신비 앞에서 멈출 줄 아는 영적 절제가 함께 필요하다. 그 숭고한 아름다움을 탐욕스럽게 삼키려는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유난히 빛나는 아침에 적절한 거리에서 잠깐 엿볼 수 있는 몇 가닥의 빛만으로도 만족하며 기뻐하는 법을 평생 배워야 한다. 그러다 마침내 ‘퀴아’(quia)의 행복, 곧 우리에게 주어진 것만으로 기뻐하는 행복을 발견한다. “인간들이여, 그러함에 만족하여라”(『연옥편』 3곡, 37행).
바로 이 환원할 수 없는 영적 핵심을 대하는 절제가, 서로의 내면을 나누고 스며드는 데 필요한 경계를 세운다. 그 경계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이를 침범하면 공동체는 그저 함께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 된다. 잘해야 몇몇 사회적 사업을 벌이고 유익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그치며, 최악의 경우에는 고통과 신경증, 폭력을 낳는다. 반면 샤밧의 공동체는 모두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도, 각자가 참된 친교와 친밀한 관계를 살아가는 곳이다. 모두가 서로에게 책임을 지며, 다른 사람들이 변화하고 성장하고 고통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엿새 동안은 곁에서 함께하고, 듣고, 타이르고, 격려한다. 그러나 일곱째 날에는 멈출 줄 안다. 그 영혼의 남다른 날이 품은 신비를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아무도 침범하지 않은 그 정원에 가장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으며, 우리가 꺾지 않을 줄 알 때 그 꽃들이 죽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욕망이라는 선물
이상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한 분석을 마무리하며, 마지막으로 욕망이라는 큰 주제를 짚어 보자. 욕망은 지금까지 나눈 여러 논의를 열린 방식으로 자유롭게 아우르는 주제이기도 하다.
욕망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말이 되었다. 그럴 만하다. 삶의 가장 근본적인 말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공동체 안에서 영적 성소를 받은 사람에게 욕망의 역동성이 작용하면, 모든 것이 더 풍성하고 다채로워지며 복잡해진다.
영적 여정을 시작하는 사람이 처음 내어놓는 선물은 자신의 욕망이다. 그는 새로운 약속에 모든 것을 걸기로 자유롭게 선택한다. 자신의 응답을 희생으로 느끼지 않으며, 더구나 상실로 여기지도 않는다. 개인적인 계획과 욕망을 내려놓으면서, 새로운 에덴에서 다른 모습으로 꽃필 무한한 가능성만을 본다. 그렇게 무한해 보이는 오늘의 새로운 욕망은 과거의 다른 모든 욕망을 흡수한다. 마침내 어느 날에는 그것만이 자신이 바라는 유일한 욕망이 된다. 공동체 안에서 자라고 커지는 욕망은 결국 구성원 각자의 욕망을 희생시킨다. 우리 자신과 세상의 다른 이야기들은 매력과 흥미를 잃는다. 카리스마 공동체의 거대한 욕망에 비하면 너무 작고 진부해 보이기에, 더 이상 바라지 않게 된다. 감정과 말, 관심과 이야기, 삶의 다양성은 급격히 줄어든다.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모두의 욕망, 곧 공동체의 거대한 욕망에만 관심을 둔다. 모두가 같은 것을 바라며, 다른 것은 원하지 않는다. 새로운 공동체가 바라는 것만 바라게 되고, 이윽고 그것을 바라야 한다는 말이 뒤따른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욕망들이 함께 존재한다. 그러나 어느 날 공동체의 욕망만이 유일하게 좋고, 권장되며, 따라야 할 욕망이 된다.
자신의 욕망을 내어 주는 이 과정은 완성되기까지 수십 년이 걸릴 수 있으며, 어쩌면 끝내 완성되지 않을 수도 있다. 처음에는 자신의 자유가 넓어진다고 느끼며, 대체로 실제로도 그렇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시간이 흐르면 바로 그 자유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이상을 중심으로 탄생한 공동체는 사람들이 내어놓은 욕망을 받아 공동체의 욕망이라는 제단 위에 희생 제물로 바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카리스마적 직관은 개인들의 욕망이 자유롭게 남아 있으면 공동체가 끝날 위험도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거나 감지하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살아가려면 구성원들이 거의 전적으로 공동체를 원하고, 같은 방식과 형태로 원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창립자들이 생애 후반에 매우 상세한 회칙과 정관을 작성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의 구성원들이 품는 욕망을 통제하고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려는 필요가 무의식적으로 드러난 결과이기도 하다. 욕망을 통제하는 것은 이상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만드는 모든 이의 꿈이다. 이들은 한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한, 공동체가 그를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거나 직감한다. 이 통제는 강요가 아니라 자유로운 헌신을 통해 이루어진다. 적어도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보이며,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도 흔히 그렇게 보인다.[3] 모든 사람이 함께 같은 것을 바라는 공동체는 그 힘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어쩌면 이 땅에서 가장 강력한 에너지를 손에 넣는 것이다. 욕망은 에로스가 드러나는 한 형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학적 관점에서 욕망을 내어 주는 것은 일종의 희생이다. 그러나 많은 희생이 그렇듯, 신자는 이를 자신이 줄어들거나 무언가를 잃는 일로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과 공동체의 경험이 더 높고 깊은 차원에 이르기 위한 조건이나, 그에 따르는 대가로 받아들인다.[4]
우리가 살펴보려 했듯이, 카리스마적 창립자를 중심으로 성장한 공동체의 초기 모습을 주의 깊게 보면, 통제는 먼저 욕망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공동체가 영화를 보거나 나들이를 가거나 영적 여정을 함께하기로 했다고 하자. 이때 한 사람이나 여러 사람이 다른 영화와 나들이, 책을 원하면, 그 차이는 이상하고 불편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하여 드러내 놓고든 은근하게든 억제된다. 구성원들이 내어놓은 욕망이 하나의 욕망으로 모이면, 공동체는 바로 그 결집력 덕분에 초기에 크게 성장한다. 옥탄가가 무한한 연료와 같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이렇게 모두가 같은 것을 바라는 방식이 어느 순간 깨지고 끝난다는 사실이다. 그 순간은 때로 창립자가 세상을 떠날 때 찾아오고, 때로는 그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찾아온다.
이러한 전환기에 나타나는 많은 위기는 구성원들이 내어놓고 희생했던 욕망의 위기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모두의 이상을 더 이상 어제처럼 갈망할 수 없어 위기에 빠진다. 그 욕망이 창립자라는 인물에게 너무 깊이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동체가 바람직하다고 정한 것만 바라도록 익숙해진 사람들은 욕망의 근육이 위축된 상태에 놓인다. 과거의 가치와 말, 생각과 이야기를 더 이상 갈망하지 못할 뿐 아니라, 결국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된다. 바라며 살아갈 만한 이야기를 직접 살고 써 나가는 법도 모른다. 지난 세월의 보물이었던 글과 녹음, 영상도 더 이상 마음을 끌지 못한다. 한때는 그것들로 기도하고 많은 사람에게 카리스마를 전했으며, 그 선포는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이제는 오히려 거부감과 반발, 정서적·영적 알레르기를 느끼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게 생의 열정과 삶에 대한 의욕을 잃는 집단적 무기력이 생겨난다. 이는 특히 이전 시기에 가장 아낌없이 헌신했던 사람들에게서 심하게 나타난다. 우리가 두 번째 유형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이다. 물론 일부 세 번째 유형도 이런 상태에 놓일 수 있다. 흔히 이때는 분노와 실망의 시간이다. 과거에 모두가 함께 품었던 하나의 거대한 욕망을 지우고 잊고 싶어진다. 이제 그것이 기만과 환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면 깊은 곳에서는 그렇게 느낀다. 이성까지 언제나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창립자와 첫 세대가 초창기에 더 깊이 사랑받고 존경받으며, 아첨과 거의 숭배에 가까운 대우를 받았을수록, 다음 세대에서는 그들과 관련된 글과 영상, 언어 등에 대한 거부감과 불편함이 더 커진다. 어떤 공동체에서는 창립자의 흔적을 실제로 지워 버리는 데까지 이른다. 제국이 무너질 때 백성들이 바로 전날까지 숭배하던 지도자의 동상과 흉상을 파괴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렇다면 공동체가 거의 언제나 고통스럽고 어려운 이 시기를 겪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무엇을 해야 할까? 먼저 병을 치료제로 착각하지 않아야 한다. 책임자와 동반자들이 생기와 의욕을 잃은 사람들에게 예전과 같은 것을 다시 바라라고 권할 때마다 이 오류가 발생한다. 오늘날의 욕망 고갈을 영적 열정이 식고, 과거의 철저함을 잃고, 안락한 삶에 젖은 데서 비롯된 잘못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지혜의 일반 원칙이 적용된다. 공동체의 많은 사람이 같은 괴로움을 호소한다면, 원인은 개인의 덕과 악덕이 아니라 체계와 구조에서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참으로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집단적인 위기로 이미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판단과 단죄까지 더하여, 이중의 고통을 안기는 것이다.
실제로 필요한 것은, 가능하다면 욕망을 되살리는 일뿐이다. 그러나 참된 치유는 모든 것이 잘되고 누구도 위기를 말하지 않던 때에 시작했어야 한다. 젊은이들과 새 구성원들이 이전의 욕망을 지워 버리지 않도록 격려했어야 한다. 공동체의 크고 다채로운 정원 안에 자신만의 한구석을 남겨 두고, 그곳을 가꾸며 물을 주도록 도왔어야 한다. 기적처럼 이 작은 공간-열정이나 관심사, 심지어 취미 하나라도-을 지켜 낸 사람은 어느 날 삶의 생기를 잃었을 때 바로 그곳에서 다시 생명을 찾았다. 네 번째 유형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그러나 공동체는 이런 개인의 작은 밭을 집착과 개인주의로, 성소가 진실하지 않다는 징표로 여긴다. 그래서 자신만의 화단을 가꾸려는 작은 시도들은 거의 언제나 빼앗겨 모두의 단 하나뿐인 정원에 흡수된다. 그리고 그 정원이 메마르면, 누구도 그곳에서 양분을 얻지 못한다.
정원이 이미 메말라 버린 뒤에는 치유가 참으로 어렵다. 나는 성공한 시도는 거의 보지 못했다. 그중에는 공동체 밖에서 마지막으로 일한 지 30년이 지난 뒤, 쉰 살이 되어 다시 도전에 나선 사람이 있다.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서른 살 청년들과 경쟁하며 채용시험을 치렀다. 힘겨운 몇 년을 보낸 뒤 그는 다시 살아났다. 친구와 동료들의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이야기에 다시, 혹은 처음으로 귀 기울이기 시작한 사람도 있다. 일과 수고, 사랑에 관한 평범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는 더 이상 이들을 공동체의 이상이나 복음으로 이끌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다시 출발하고 무언가를 갈망해 보기 위해, 참된 인간다움의 작은 부스러기라도 청해 배울 스승으로 바라보았다. 또 다른 사람은 노년에 실제 가난한 이들 가운데로 돌아가 살았다. 그곳에서 그들의 말을 참으로 듣고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늘 말하면서도 한 번도 살아 보지 못했던 형제애가 마침내 태어났다. 어떤 여성은 20년 동안 그저 생계비를 벌려고 해 온 일을 다시 하고 싶어 하는 마음부터 되찾으려 했다. 일을 출발점으로 삼아 식탁을 차리고 식물을 돌보는 법도 배웠다. 이 작고도 작은 일들 속에서 다시 무언가를 바라기 시작했고, 그저 삶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풀밭의 향기, 별빛, 말을 건네는 사람의 반짝이는 눈,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개를 사랑하게 되었다. 다시 살아난 사람들은 과거에 갈망했던 것들에 대한 생각을 멈춘 이들이었다. 종교적·영적 대상도 예외가 아니었다. 갈망과 진실을 담아 다시 ‘하느님’이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려면, 종교에도 휴경기가 필요하다. 그 시간은 여러 해가 될 수도 있다. 나는 20년 동안 이런 이름들을 더 이상 입에 올릴 수 없었던 봉헌된 사람들을 알았다. 어느 날, 이미 나이 든 그들 안에 ‘예수님’이라는 말이 가느다란 침묵의 숨결처럼 떠올랐다. 그것은 생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반면 종교적 삶을 다시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삶을 다시 시작한 사람들도 있다. 다시 살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어딘가 하느님이 계신다면 더없이 기뻐하셨을 것이다. 생명의 하느님이 아닌 하느님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땅과 친구들, 자연과 바다와 바람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노년에 이르러 인간으로 살아가는 법을 다시 배웠다. 그리고 새로운 욕망들이 다시 꽃피었다. 젊은 시절의 욕망과 매우 다르면서도 매우 닮은 욕망들이었다. 때로는 함께 품는 새로운 욕망도 생겨났다. 초창기의 욕망처럼 다시 커다란 욕망이었다. 다만 더 성숙하고, 더 인간다웠다.
[1] 희년은 안식년을 제곱한 해다(7×7).
[2] 예수님은 아마도 당신이 직접 하신 말씀인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를 통해, 하느님과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당신의 시선에서 결정적인 것을 알려 주신다. ‘사람의 아들’은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마르 2,28)으로 드러내신다. 우리 종교와 이데올로기의 수많은 잘못된 안식일에서 우리를 해방하시려는 것이다. 샤밧의 참된 예언자적 의미를 되찾도록,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안식일의 법에서 벗어나 그 정신을 발견하라고 요구하셨다. 이는 성전과의 관계와도 매우 비슷하다. 샤밧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참된 ‘예배’다(요한 4). 샤밧은 시간의 성전이다. 성경의 하느님을 만나려면 성전과 샤밧에서 벗어나, 그 둘을 “영과 진리 안에서” 다시 찾아야 한다.
[3] 실제로 여러 형태의 조종과 심리적 영향이 있을 수 있고, 실제로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자신의 행동이 미치는 영향을 알지 못한 채, 의도 없이, 적어도 충분히 의식적인 의도 없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선의의 측면도 공동체 안에서 양심에 대한 침해와 남용을 식별하는 과정을 매우 복잡하게 만든다.
[4] 고대의 종교와 의례에서 희생 제사는 빼앗김이나 학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람과 아이들까지 제물로 바쳤으며,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이를 특권으로 여기기도 했다. 희생 제사는 죽을 운명에 놓인 동물이나 인간을 영원의 차원으로 들어가게 하므로, 역설적으로 죽음을 이기는 방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어떻게 해석되어 왔는지에 관해서도 할 말이 많다. 이에 관해서는 나의 요한 복음 주해인 『네 번째 복음서』(Il quarto Vangelo), 바오로 출판사, 밀라노, 2026을 참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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