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아침, 이제 출발한다는 이가람 박사의 문자가 단톡방에 뜬다. 상현숙 편집장과 이가람 박사, 그리고 나는 지난 8월부터 L'ethos del mercato를 함께 읽으며 수정하고 있다. 이 작업을 10월 안에 끝내야 예정된 시기에 출판이 가능하기 때문에 처음 주 1회 만나던 것이 이제는 주 4회까지 속도를 높였다. 대부분 zoom으로 만나지만 오늘은 오랫만의 오프라인 만남. 나도 일찍 학교에 왔다. 페북에서 루이지노의 글을 보고 가슴 뭉클. 이 작업 또한 우리 감사의 표현이 될 수 있기를! .......................................................................................................
루카는 방금 전, 우리 자신이 “쓸모없는 종”(루카 17,10)임을 말한 직후, 정반대의 진리를 제시한다. 곧 예수 자신이 우리의 상호성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최소한 감사의 마음을 통해 그분께 유익한 존재가 된다. 그 감사는 율법으로부터 배제된 자, 곧 이방인, 파문당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 사마리아인에게서 흘러나온다. 복음은 이처럼 역설(paradosso)의 공간 안에서 열리며, 그 역설을 살아낼 때 비로소 복음은 이해된다.
예수의 참된 인간성은 그분의 상호성과 감사에 대한 필요 속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감사와 응답이 인간 존재의 부차적 정서가 아니라, 인간됨의 본질적 요소임을 드러낸다. 우리 역시 사랑하는 이의 **응답하는 시선(lo sguardo reciprocante)**을 갈망하며, 그 시선을 얻기 위해 가장 진심 어린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고, 때로는 미숙한 선택을 하기도 한다. 예수 또한 이러한 감사의 존재와 결여에 깊이 마음을 움직이셨다. 우리가 무상한 만남 속에서 기쁨을 느끼고, 그것이 결여될 때 고통을 느끼듯, 예수도 그 점에서 우리와 닮아 계신다.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 속에서도 여전히 병든 이들과 배제된 이들을 치유하는 사명을 이어가신다. 이는 그분의 공생활 전반을 특징짓는 행위였다. 예수는 많은 것을 행하셨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몸과 영혼의 고통을 치유하는 분이었다. 이 본문 속 나병 환자들은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이 함께 등장한다. 공동의 질병이 그들 사이의 적대와 증오를 넘어서는 새로운 공동체를 탄생시켰다. 고통과 주변부의 자리가 오히려 가장 깊은 통합의 장소가 되는 일은 드물지 않다. 그곳에서는—고통 덕분에 혹은 그 고통을 통해—모든 분열 이전의 공동 인간성이 다시 발견된다.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 사이의 형제적 연대(solidarietà fraterna)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현실 중 하나이며, 그것이 아름다운 까닭은 덧없음 때문이다. 그 연대는 고통이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는, 찰나적이지만 진실한 인간성의 표지다. 나병 환자들은 예수를 “스승”이라 부른다. 그들은 그분을 스승이자 구원자로 인식한다. 복음서 전반에 흐르는 근본적인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곧 가난하고 배제된 자들이 가장 먼저 예수를 알아본다는 사실이다.
하늘 나라에서는 단순히 치유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감사의 형태로 드러나는 상호성이 필요하다. 예수의 치유 행위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감사를 통해 완성되는 과정의 시작이었다. “감사 없는 선물은 완전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처가 된다.” 이 말은 인간의 삶에도, 그리고 예수가 여신 새로운 생명에도 적용된다. 예수가 가르친 아가페(agape) 역시 감사와 상호성의 부재 앞에서는 상처받을 수 있는 사랑이다. 물론 사랑은 응답받지 못하더라도 계속될 수 있다 — 예수는 바로 그 사랑의 스승이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은 부재와 결핍의 자리에 머문다. 사랑의 정상적 상태는 상호성(reciprocità) 속에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상호성을 넘어설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때로 아무런 응답이 없어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출처: 루이지노 브루니, 「루카 복음서 주석」, 파올리네 출판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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